"우리가 잃어버린 그 太初의 世界를 노래하는 눈부신 視覺의 交響曲"

1.흔히 서양화는 인물을 그리고 동양화는 산수풍경을 그린다고들 말한다. 이 말은 서양화는 인물의 회화라는 뜻이고 동양화는 풍경 중심의 회화라는 걸 뜻한다. 그렇게 보면 신동권 양선홍 부부의 그림도 신동권이 인물화를 양선홍이 풍경을 그려야 상식인 것이다. 신동권이 서양화 전공이고 부인인 양선홍이 동양화 전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동권은 풍경을 그리고 양선홍은  인물이나 花鳥를 그린다. 오늘의 동서양화가 구별되지 않는 실정과도 대응되지만 그러나 엄격히 따지자면 원래 풍경과 인물이 따로 그려진 것이 아닌 것이다. 수려한 풍경속에 훌륭한 인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수려한  풍경이 있듯이 인물과 풍경은 그림을 이루는 기본 요소인 것이다.

클라크 케네스(Kenneth Clark)의 설에 따르자면 풍경은 원형을 그리는데 있다. 그러니까 수려한 풍경과 훌륭한 인물이 결합되는 것은 고전시대의 서양화에서도 그렇지만 동양화의 전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오하게 보이는 산수풍경을 뒤로하고 서있는 한 여인을 그린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새삼 거론한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풍경이 인물화나 역사화의 무대로서가 아니라 당당한 풍경화가 되는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클라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토지를 명료하게 표시하는 이 지리적 풍경화 양식은 비록 인물이 제외되거나 축소되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낙원사상의 맥락을 잇는 이상주의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푸생(Nicolas Poussin)의 네 계절 을 다룬 풍경화가 밀톤(Milton)의 실락원(失樂園)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것도 그 점을 뒷받침한다. 멀게 잡힌 바다와 항구 떠오르거나 지는 해 항구 양쪽으로 늘어선 고풍스런 신전 건물들. 그리고 아주 낮은 시선 속에 잡히는 인물들의 낭만적인 전경들 이런 풍경은 바다나 항구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낭만주의 시대의 풍경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막막한 들판이나 우거진 숲 그리고 떠오르거나 지는 해와 그 햇살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신의 그림자가 그곳에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분명히 신동권의 그림에도 그런 요소들이 있음 직해 보인다. 둥근 해, 혹은 달,  혹은  단순한 원(圓)일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빛의 보라를 거느리며 장엄하게 공중에 떠있다. 막막하게 펼쳐지는 들 하늘 그리고 홀로 서있는 나무와 숲은 우리가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은 아닌 것이다. 신의 그림자가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을까. 분명한 것은 그의 풍경은  육감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풍경을 이루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하늘, 해, 들, 산 나무들이 어느 것 없이 동일한 평면 위 에 놓이며 따라서 풍경화의 계절적인 의미나 공간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신이 계절(시간)과 대지(공)를 창조하였다면 분명히 그의 풍경에서는 신의 그림자가 사라졌다고 말 할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신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풍경을 심상세계로 끌여들여 이를 낭만주의적으로 해석해 보려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시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로이스탈(Roistal)이나 터너(Turner)의 풍경화를 보면 캔버스 전체 면적에서 대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거의 3분의 1로 작고 그 나머지 여백은 바다와 하늘로 채워진다. 대지가 작아지는 것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도피를 뜻한다. 중요한 것은 바다의 무거운 침묵과 자욱한 안개와 뭉게구름들이 미묘한 정감을 자아낸다. 워즈워스(Words Worth)의 시에서처럼 자연은 그들에게 있어서 절대자의 표현인 동시에 이상화된 자아의 장엄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들은 엄격하고 치밀한 데상과 스케치를 통해 한떨기의 꽃이나 한 개의 잎사귀에서도 숨소리를 놓치지 않는다.

바다, 구름, 산, 들, 나무, 풀잎과 곤충, 빛과 공기마저도 그것은 이들의 만남의 대상이고 생생한 감동 그 자체이다. 신동권 의 풍경을 보자. 과연 그런가. 그의 풍경에서 인간이 땀을 흘리기 위해 발을 내 딛을 수 있는 대지는 얼마나 있는가. 프랑드르(Frandr)의 풍경에서 처럼 그의 그림에서도 대지보다는 하늘과 바다와 안개 같은 대상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훨씬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선은 대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멀리 그리고 저 높이 아득한 곳으로 치닫는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의 풍경을 낭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사실 그의 대지는 나무로 상징된다. 대지는 존재하지만 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지는 한 개의 언덕이어도 좋고 미지의 세계를 처음 딛는 발판 같은 것 예컨대 달표면 과 같이 브라운관을 통해 보는 먼곳의 어떤 발판이어도 상관없다. 오로지 나무와 숲을 키우거나 떠받치기 위해 있는 필요한 대지. 어쩌면 그런 것들은 우리들의 머릿속이나 마음속. 혹은 꿈속에만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풍경을 <심상 적 인 자연>이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도 그런 시각 때문이다.

우리들의 시인 한용운의 그 불심같은 자연 풍경을 연상할 수가 있다면 신동권 의 풍경이 자연의 일상적인 시각이 아니라 절대적인 시각을 향해 있음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신동권 의 나무를 보자 그의 나무에는 표정이 없다. 분명히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사귀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나무에서 그런 것 들 이 확인되지 않는 것 은 그의 나무가 그것을 보고있는 나처럼 살아서 굼쉬는 나무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는 나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해나 구름과 같은 다른 우주적인 존재와 마찬가지로 나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나무에는 변별적인 나무의 여러 요소들이 선명하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들이 숨겨지거나 생약 된다. 만일 나무의 잎사귀가 그의 그림에서 선명하게 변별(辨別)된다면 나무는 대지를 더 구체적으로 들어낼 것이고 새들과 짐승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신동권 의 풍경에서 그것들이 생략되는 것은 나무가 해와 바람 그리고 구름과 함께 하나의 우주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저 신화시대의 거인의 눈처럼 천리(千里)를 향한 시선이라면 분명히 그의 풍경은 지리적 풍경화가 아니라 우주적인 풍경화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2. 20세기 소설의 기념비적인 대작인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헤르메르 의 풍경화 <델프트 전망>이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있다. 그의 소설에서는 시종일관 관습적으로 체험되는 현실(사건) 은 무의미 한 것이고 도리어 그런 것들이 제거될 때 가 중요시된다. 그가 소설의 제목을 읽어버린 시간이라고 만한 것은 바로 그 관습적이고 일상적 인 것 에 묻혀버린 시간을 뜻하는 것이어서 그 소설 속 의 풍경화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게 한다. 사실 그림은 설명적인 기능보다는 묵시적인 기능을 지닌다. 한 점의 풍경화(델프트 전망)가 그의 소설 속에 편입되고 그 그림이 소설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되어 있는 것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의 묵시적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말없이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 졸졸 흐르는 시냇물, 풀 한 포기, 떠오르는 해, 그것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매일 매일의 자연이 아니고 저 우주적인 태초의 시각으로 체험될 때 만나게되는 그 "잃어버린 시간"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신동권 의 풍경에서도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그 가슴 설레이는 체험에 접근할 수도 있으리라. 그의 나무를 보라. 언제나 화면의 중심에 서서 머리 위 에 태양을 맞이하고 있다. 나무와 태양이 언제나 동일한 직선상 에 위치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거석문화(巨石文化)시대의 환상석(環狀石)의 기능처럼 해맞이의 그 원시적인 경험을 재생하려는 것이나 아닌지 환상석 과 일치하는 해를 우주적 시간의 흐름으로 본다면 그의 나무를 우주적 나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엘리아데(Elriade)가 우주목(Cosmic tree)이라고 불렀던 리네 신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해뜨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해동(海東)이라고 불렀던 것도 해맞이중 고대적이 축제에서 왔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 그것이 동(東)이 나무(木)와 해(日)를 결합시킨 글자라는 점에서도 그 뜻이 선명해진다. 신동권의 풍경은 나무와 해가 수직선상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동(東)의 의미를 나타냄다고 말할 수 있지 않는가. 머리 위에 떠있는  해가 나무와 중복된다면 그것은 그림이기전에 완벽한 문자가 되는 것이다. 세계의 중심, 우주의 중심을 우주목이라고 한다면 그의 풍경은 분명히 신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신화는 최초에 한 그루의 나무를 노래하였을까. 에덴 동산의 무화과 나무, 제우스신의 올리브 나무, 석가모니의 보리수, 단군 신화의 신단수, 그것들은 모두 거창한 문명의 시원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최초에 있었던 인간의 깨달음의 기억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최초에 있었던 인간의 깨달음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있다.

베르메르(Bermer)의 풍경화가 푸르스트에게 이어서 깨달음의 기억이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리라. 말없이 서있기만 하는 숲과 잔잔한 호수앞에 늘어선 나무들 그리고 침묵의 하늘과 구름들. 그것들은 한 순간에 벙어리처럼 정지되어 버렸지만 거기는 영원한 침묵의 소리가 있다. 신동권의 풍경도 침묵의 소리를 들려주는가 물론 우리는 그의 풍경화가 대단히 기교적이고 수식적이란 걸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해와 나무와 바다. 그리고 하늘. 이러 모티브가 동일한 평면에 놓이면서도 그것이 공간감을 이루는 것은 그의 독특한 색채 원근법 때문이다. 그의 색채 원근법은 그러나 공간적이기 보다는 더 많이 음악적이라고 해야 옳다. 그가 밑그림에 더많이 신경을 쓴다거나 미묘하고 섬세한 느낌을 끌어내기 위해서 판화에서만 얻어낼 수 있는 실크스크린의 효과를 연출하고 있는 것도 그 점을 뒷받침 한다. 그는 평면에 연출한 감각적인 섬세함 속에 빛(색)을 이끌어 들이면서 다양한 굴절의 효과를 얻어낸다. 때때로 그것은 우리에게 음악적인 호소력이 되기도 하고 눈부신 시각의 교향곡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색채나 장식성의 절제와 유연성일 것이다. 귀중한 것은 옷장 깊숙이 감추어 두듯이 소중한 감정이나 기억들은 분명히 유연성 있는 절제 속에서만이 오래 오래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3. 신동권이 우주적인 자연을 노래하는 동안 양선홍은 천상으로 날아 다니는 천사(仙女)와 그 권속들을 그린다. 어떤 형태이든 사람이 없는 우주는 무의미할 것이고 또 사람만 있는 우주 자연도 무미건조할 것이다. 양선홍이 그린 화조(花鳥)들은 그가 그려내고 있는 선녀의 들러리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인물과 화조가 공교롭게도 신동권의 우주적인 풍경과 아주 걸맞는 주제라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akfk자면 이 부부는 합창을 하듯 상호 보완적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그 태초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해와 나무만이 외롭게 존재하는 신동권의 침묵의 공간을 양선홍의 천사와 꽃들이 날아 다닌다고 상상해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더없이 즐거운 상상이 아닐 수 없으리라. 온갖 상서로움으로 가득찬 천상(天上)을 마음껏 날아 ekl는 천사를 보라 비록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나비처럼 허공을 훨훨 날아 다니는며 바람과 구름과 별들과 함께 노닐고 있다. 세상의 온갖 죄악스런 업(業)으로부터 벗어남이 없이 어찌 하늘을 나는 이 성스런 날개를 얻을 수 있을까.

양선홍이 그린 선녀는 물론 오늘의 미의식을 반영하고 있지만 그 양식은 전통적인 진체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이 말은 그의 작업이 전통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계승하는 입장이고 전통적인 양식안에서 현대적인 것을 이끌어 내려는 입장인 것이다. 얼른 보기에 그의 작품들이 채색으로 그리고 세필작업으로 빈틈없이 메꾸는 이른바 재래의 진채화 같이 뵈지만 공간을 한정(限定)하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컨대 인물이나 새, 나비, 극락조를 배치할 때에도 전통적인 방법에서처럼 기념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무대의 주인공처럼 많은 것들을 더불어 움직이게 만든다. 선녀가 부는 피리소리에 꽃이 되어 온누리에 흩어진다거나 혹은 나비가 회오리 바라믈 일으키며 공간을 뒤흔들어 놓은 것 등이 그렇다.

피리부는 선녀나 공작새가 전설이나 전승적인 것이지만 그의 그림에서는 마술처럼 살아서 움직인다. 그렇게 표현하기 위해서 작가는 때로는 진채 위에 다시 화선지를 배접하여 세필로 그려진 대상의 원근이나 강약을 근접하여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들어내 보인다. 이런 노력은 단순한 진채작업과는 구별되는 지극히 개성적이고 감각적인 작업이다. 사실 전통적인 의미의 채색은 단순한 감성이나 감각을 어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채색은 우주저긴 세계관(음양오행)의 표현이어서 채색을 변형하는 일, 예컨대 보색을 사용하거나 채색의 단순한 그라데션을 시도하는 일은 옛날에는 금기였다. 채색의 한자인 彩를 글이라거나 혹은 광채라고 규정한 것은 그 점을 말해준다.

사실 채(彩)는 글자가 없었던 고대에는 타피스트리가 단순한 장식보가 아니라 신성한 글을 기록해둔 책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진채그림이 타피스트리와 같은 것이어서 진채그림의 색채는 엄격히 타피스트리의 색태사상과 동일한 것임은 물론이다. 분명히 양선홍의 색채는 고전적인 규범속에 있지 않다. 그의 색채는 그 규범을 자신으 취향이나 어떤 가능성에 접목시키려는 색채로 이해된다고 하겠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말하는 사랑이나 화합의 개념을 실감케 만들기 위한 채색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선녀들이 수태고지(受胎告知)를 위해 천상으로 내려오는 기독교적인 천사가 아니고 병자를 구하기 위해 약병을 들고 내려오는 불교적인 선녀도 아니며 큐피드의 화살을 맞은 그리이스 신화의 천사도 아닌 것은 그 점을 뒷받침 한다. 양선홍의 선녀는 하나의 이상이고 꿈이고 바램이다. 선녀와 공작새가 같은 이미지로 부각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더욱 그것들이 단순한 진채방법으로 화면 위에 나열되는 것이 아니고 섬세하고 예민한 감각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지는 것은 분명 그런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신동권 양선홍 부부가 한쪽이 낙원의 무대를 만들고 다른 한쪽이 그 무대 위에 주역을 만들어서 한판 어울어지게 합창하는 전시회를 갖는다는 것은 매우 흐믓한 일이 아닐 수 없다.
 

美術評論家(東德女子大學校 敎授) 朴容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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